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케다 신겐 (문단 편집) === 판도 확장 === 다케다 가문이 터 잡은 카이([[야마나시현]]), 시나노([[나가노현]]) 지방은 산이 많아 농업도 불리하고 바다도 없어 교역하기도 좋지 않았지만, 일본에서 손꼽히는 [[말(동물)|명마 산지]]라서 [[군마]]가 풍부해, [[기병]] 활용에 유리하다는 거대한 군사적 잠재력을 갖춘 지방이었다. 그동안은 여러 군소 세력으로 쪼개져 있어 그 잠재력을 폭발시킬 기회가 없었지만, 신겐은 가독을 물려받은 이후 카이, 시나노를 신속하게 통일해 전국시대 일본의 강대 세력으로 성장한다. 물론 이 시대 일본 말은 땅딸막한 [[조랑말]] 수준이고 충격기병으로 활용할 순 없었지만, 그래도 경사진 산야에서 자라 다리가 튼튼한 카이 말들은 인간의 두 다리보다 훨씬 빠른 시속 40km로 달릴 수 있고 인간이 들기 힘든 무거운 짐도 나를 수 있으므로 [[아시가루]] 위주로 굴리는 적들보다 훨씬 유리하게 싸울 수 있었다. 신겐은 가독을 물려받은 이후 카이의 내외부를 평정하고 북부의 시나노에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, 스와[* 특히 스와씨의 [[스와 요리시게(센고쿠 시대)|스와 요리시게]]는 신겐의 4남이자 후계자인 카츠요리를 낳은 [[스와고료닌]]의 아버지였다.], 운노[* 이미 선대 노부토라 시절에 큰 타격을 입었던 곳이라 크게 저항하진 못했고, 나중에 신겐이 장님이었던 자신의 둘째 아들을 이 가문에 양자로 보내 운노 가문을 잇게 하는 회유책을 써서 흡수한다.] 등 유력한 지방 호족들을 격파하고 카이, 시나노에 걸쳐 패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. 그러나 이 과정에서 최후의 장애물이었던 북시나노의 호족 [[무라카미 요시키요]]가 나름대로 강하게 저항해서 1548년에는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신겐에게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다. 그러나 신겐의 계속된 공격에 무라카미도 1553년 못 버티고 성을 버리는데, 그는 에치고의 [[우에스기 겐신]]에게 도망쳐 원군을 요청한다. 이렇게 신겐은 승승장구하던 그의 인생에 최대 호적수를 만나게 된다. 이후 둘은 [[카와나카지마 전투|카와나카지마(川中島)란 지역을 두고 다섯 차례에 걸쳐 북시나노의 패권을 두고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, ]]대부분 지리한 대치로 직접적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으나 네 번째 전투에서는 쌍방의 생사를 걸고 크게 맞부딪쳐 서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. 보통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이 네 번째 전투(하치만바라(八幡原) 전투라고도 한다.)를 일컫는다. 후호조씨의 [[호조 우지야스]]에게 패해 쫓긴 [[우에스기 노리마사]]는 막부에 청을 넣어 [[우에스기 겐신]]에게[* 켄신은 여러 사정으로 평생 이름이 자주 바뀐 인물인데, 나가오 카게토라에서 이 당시 우에스기 성을 계승하고 곧이어 우에스기 마사토라로 이름을 바꾼다. 전투 당시의 이름은 우에스기 마사토라.] 우에스기 일족을 계승하게 하고 [[간토 간레이]](關東管領) 직을 물려준다.[* 칸레이 직은 당시 막부의 권위 실추로 유명무실한 직함이었으나, 여전히 한 지방을 통솔하는 슈고 다이묘들 여럿을 통솔하는 권위있는 자리였기 때문에, 일개 슈고에 불과했던 다케다 신겐은 라이벌이 자기 위에 서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죽을 때까지 켄신을 나가오 성으로 불렀다고 한다.] 이후 켄신에게 맹공을 받은 호조 우지야스는 이마가와 씨와 삼국동맹을 맺은 바 있는 오랜 맹우 신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, 신겐은 북시나노로 북상해서 켄신의 뒤를 치려고 한다. 물론 이는 호조와 대치하던 켄신에게 큰 위협이었기 때문에 켄신은 시나노에서 신겐 측의 가장 중요한 거점인 카이즈 성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에치고를 출발하고, 양군은 카와나카지마의 하치만바라에서 대치하게 된다. 전투의 상세 경위는 [[카와나카지마 전투]] 참조. [[피로스의 승리|이 전투의 결과로 다케다 신겐은 엄청난 손실과 함께 유능한 가신들을 다수 잃었으나 결국 목표했던 카와나카지마의 패권을 장악했으므로 일단은 승리라 할 수 있다.]]하지만 시나노 북쪽은 결국 우에스기로부터 빼앗지 못하고 분쟁지역으로 남게 되었으며, 아들 카츠요리 대에 [[우에스기 카게카츠]]를 밀어주는 조건으로 얻게 된다. 남쪽에서는 [[이마가와 요시모토]]의 교토 진출이 [[오케하자마 전투]]에서 [[오다 노부나가]]에게 패배해 좌절되었는데, 이렇게 약화된 이마가와에 손을 뻗친 신겐은 이때다 하고 [[이마가와 우지자네]]를 공격해 남쪽 바다에 인접한 스루가를 손에 넣는다. 하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혼인관계를 맺어 온 맹우인 이마가와가 궁지에 처하자마자 배반해 뒷통수를 친 행동은 말할 것도 없이 저열한 배신행위였으므로 많은 다이묘들에게 다케다 가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평판을 얻는 등 신겐은 이 선택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. 특히 [[삼국동맹]] 관계였던 [[후호조씨|동쪽 간토의 호조 가문]]과 동맹이 깨져 적대하게 되어버린 게 컸다. 대신 그가 염원하던 바다에 면한 대지를 손에 넣게 되었다. 이로서 다케다는 [[내륙국]]으로서 가지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. 바다와 해운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특히 카이는 [[소금]]이 나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마가와와 호조씨가 소금 무역 봉쇄령을 걸어서 괴로워했던 사건도 있었을 정도. 이때 겐신은 이 전략이 비겁하다고 생각해 숙적 신겐에게 소금을 공급해 이야기가 일본에서 유명한 '적에게 소금을 보낸다'라는 고사가 되었다.[* 신겐은 소금을 보내준 겐신에게 답례품으로 칼을 보냈다고 전하는데, 현재 [[도쿄국립박물관]]이 그 칼을 소장하고 있다.] 무사도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일화다. 본래 후계자였던 [[다케다 요시노부]]가 후계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유폐된 뒤 얼마 안 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는데, 자살했다고도 하고 병사했다고도 한다. 이를 이마가와와의 전통적 동맹관계 단절과 연관시켜, 아내가 이마가와 가문 출신이었던 요시노부가 이끄는 친 이마가와 파와 이마가와 공격을 주장하는 反이마가와 파의 파벌 다툼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.[* 이때 요시노부의 스승이자 중신이던 오부 토라마사도 반역 의혹을 받고 할복당했는데 이 오부의 동생이 바로 반역자인 형 때문에 성을 바꾼 다케다의 명신 [[야마가타 마사카게]]이다. 오부는 붉은 색의 무구를 착용한 정예부대 '[[아카조나에]]'를 이끌고 있었는데, 반역 사건 후 아카조나에 부대는 동생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인수해서 각국의 공포의 대상이 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